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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괜찮아, 괜찮아. '사랑이면' 괜찮을꺼야.



(이 영화에는 그 유명한 '大액션배우' 성룡의 아들이 출연한다.
이름하야 방조명.. 방에 형광등 다냐? 방 조명... 미안하다;
어쨌든 이 영화로 그간의 유치짬뽕스러웠던 연기력을 뛰어 넘어
한층 성숙한 모습으로 호평을 받았다. 피는 못 속이나보다)


해석의 한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그 자체로 다양한 해석의 열린 가능성을 낳는 영화다. 각각 네 개의 에피소드로 느슨하게 연결된 서사구조는 시간적으로도 순차적이지 않고 배경도 각기 다르며 에피소드 간의 인과성 역시 추론에 기대야 할 정도로 모호하다. 그러나 ‘열린 텍스트’라고 해서 그것이 곧 ‘해석의 방종’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례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쓰기도 한 동시대의 가장 뛰어난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는 일련의 도저한 척하는 ‘포스트모던적 해석’이 지닌 ‘야바위적 성격’을 비판한 바 있다. 에코 스스로도 <장미의 이름>을 ‘열린 작품’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텍스트 고유의 흐름과 맥락을 잃고 제멋대로 뜯어 붙인 해석에는 분명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아무리 컬트적인 작품이라 할지라도 텍스트에는 일정한 질서와 목적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 해석을 담보하는 쟝웬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또한 작가의 면밀한 구성과 장치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작정하고 브뉘엘이나 달리, 데이빗 린치처럼 초현실주의 영화를 찍어낸다 해도 그 내포적(Connotative) 의미체계는 기실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안달루시아의 개> 역시 열렬한 프로이트 추종자였던 브뉘엘과 달리가 정신분석학에 응답하려했던 기획에 다름아니었다는 사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텍스트의 ‘열림’은 수용자의 참여에 의해서만 작동된다는 것이다. 관객 스스로가 텍스트 속에서 일종의 ‘미로 찾기’와 같은 유희적 해석을 시도할 때만이 비로소 열린 작품은 완성될 수 있는 거다. 다시말해 열림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며 과정이자 실천이다.

감독 쟝웬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라는 자신의 영화적 미로 속으로 우리에게 해석의 유희를 제안해왔기에, 나는 이어지는 글을 통해 그 요청에 적극적으로 화답할 참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충분히 흥미로운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해석 역시 일정한 논거와 규칙에 기반하지 않으면 작가와의 소통에 도달하지 못하는 잡음의 덩어리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명시해 두고서. 이제, 출발한다.


(이 모든 수수께끼의 원흉. 강문(쟝웬)감독. 원흉답게 사람좋은 웃음을 마냥 흘려대고 있다;
배우출신이며, 장이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 등에 출연한 바 있다.
감독작으로는 <햇빛 쏟아지던 날들>이 대표적이며, 최근작으로는 <귀신이 온다>가 있는데
<귀신이 온다>엔 <유레루>,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등에 출연했던 카가와 테루유키도 나온다;
재밌으니 찾아보시길. 테루유키가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다잼따)


꿈을 쫓는 여인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은 기다림이다. 현실에서 우리 눈에 비쳐지는 타인의 삶과 사랑은 그것의 이해에 도달하기까지 항시 오랜 기다림과 끈기를 요한다. 이 영화도 그렇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 주인공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직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아니, 마지막 에피소드가 종결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관객의 내면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심상이 차오른다. 그 심상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 영화의 서사적 수수께끼에 정신분석학적인 독법이 유효하다고 본다.



첫 번째 이야기. 영화는 마치 맨발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라도 되는 양, 정성스럽게 여인의 하얀 발을 커다랗게 클로즈업한다. 이윽고 집밖으로 나온 그 발은 시골길의 흙바닥을 타박타박 거닐기 시작한다. 가게에 들러 물고기 모양의 신발을 한 켤레 사는 여인. 첫 번째 에피소드는 1976년 봄 중국 남부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다. 엄마는 평소 맨발로 돌아다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지만, 지난밤 꿈속에서 봤던 물고기 모양의 신발에 이끌려 이튿날 신발 가게로 향한다. 그러나 신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나뭇가지에 걸어뒀던 신발은 사라지고, 엄마는 그때부터 미친 사람처럼 이상한 행동을 반복한다. “괜찮아, 괜찮아.”라고 지껄이며 날아드는 앵무새의 말소리를 듣질 않나, 나무에 올랐다가 뛰어내리지를 않나, 나무를 바로 세운다며 밑둥을 파헤쳐 돌덩이들을 캐내질 않나… 어머니가 정말 미쳐버린 걸까?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가서야 밝혀지게 되지만, 엄마는 알로샤라는 먼 나라의 남편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극 초중반에는 엄마가 화톳불 앞에 앉아 아들에게 생면부지의 아버지에 관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녀는 자신이 처녀였을 때 만난 아버지(알로샤)의 ‘총’ 길이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얘길 해준다. 이 때 엄마의 모습은 영화 첫 장면에서 그녀가 신발 크기를 고를 때 보여주던 손동작 모습과 유사하다. 즉, 그녀가 산 물고기 신발이 팔루스(phallus)에 대한 일종의 은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꿈을 쫓아 헤매는 여인이다.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 현현되는 꿈속에서의 신발을 현실에서도 되찾고 싶어했지만 신발은 나뭇가지 위에서 곧 증발해버리고 만다. 왜? 그 팔루스는 실체가 아니라 ‘환상’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사랑을 잊지 못하고 집착하는 엄마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미친 열정의’ 사랑이다. 자신을 내던져야만 하는, 그리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돌볼 줄 모르는 상태에 이르는 맹목적인 사랑이다. 그렇기에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를 보살펴야하는 역전의 상태에서 양육된다. 아들은 엄마를 걱정하여 비슷한 신발을 사다 주지만 엄마는 자신이 잃어버린 그 신발이 아니라며 싸늘하게 아들의 주판을 내던져 버린다. 땅에 떨어져 박살나는 주판.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다음 씬에 등장하는 아들의 ‘새’ 주판 크기가 아버지 총에 관한 일화에서처럼 작게 줄어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아들이 아버지의 팔루스를 대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복합적으로 곧 ‘거세 컴플렉스’와도 연관된다.(라캉의 상징계에서 모든 아버지는 이미 ‘살해된’, ‘거세된’ 아버지이다) 피할 수 없는 오이디푸스 시나리오의 반복(이쯤되면 식상하기까지 하다). 총과 주판의 크기는 모두 그 과정에서 상처입을 수 밖에 없었던 남성성을 암시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로 잠시 건너뛰어보자. 아들은 근처로 이사온 이웃 유부녀와 간통하던 잠자리에서 “나를 알로샤라고 불러줘요”라며 스스로를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이 장면에 이르면 위와 같은 추측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아들은 목적달성이 금지된 사랑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채 태어났으며, 어머니의 대리인을 찾으려 했으나 그의 유년은 필연적으로 결핍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잔혹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다시 첫 번째 에피소드. 나날이 더해가던 엄마의 기행을 참다못한 아들은 그녀가 나무 밑둥에서 캐내어 이고 다니던 조약돌의 흔적을 쫓아 우연히 강 건너 신비한 장소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발견한 건 바로 조약돌로 지어진 동그란 집. 꿈에서 집은 보통 어머니의 몸을 상징한다. 계모에 의해 숲속에 버려졌던 헨젤과 그레텔이 길가에 뿌려둔 조약돌 표시를 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던 동화 속 설정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에서, ‘알’ 모양의 포근한 조약돌 집은 ‘과자’로 지어진 집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체를 상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몸을 상징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아들이 불현듯 재채기를 해대자, 조약돌 집 안의 모든 것들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불안한 존재로 묘사되던 엄마의 자아가 이제 완전한 분열국면에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이는 끝내 맹목적인 사랑의 열병을 견디지 못한 존재의 구슬픈 비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조약돌 집에서 도망쳐 나온 아들이 집으로 귀환하자, 엄마는 태연한 모습으로 그를 맞이한다. 마치 이별을 준비하려는 듯, 그동안의 이상했던 행각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아들의 볼을 쓰다듬는 엄마의 발엔 잃어버렸던 물고기 신발이 고스란히 신겨져 있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애매한 경계에서 마침내 꿈을 이룬 엄마. 얼마 후, 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엄마의 빈 옷가지와 신발은 강물에 유유히 떠내려간다.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이다. 영화는 마치 현실 속에서는 그 꿈을 이룰 수 없었음을 낭만적인 시선으로 차분히 감싸려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행복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미치지 않고서야, ‘진짜’ 행복이라는 ‘진짜’ 사랑이라는 게 뭔지 우리는 알 수 있을까?


배신당한 남자의 이야기
곧이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1976년 여름의 중국 동부로 옮아간다. 기타를 치며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는 량선생이 등장하고, 그의 뒤로 젊은 여인들이 즐겁게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다. 이 때 갑자기 걸려오는 변태의 전화. 여학생들이 차례로 비명을 질러대자 량선생은 수화기를 들어 변태를 응징한다. “애미랑 붙어먹을 놈 같으니”. 이는 량선생이 뭇 여성들을 거느릴만한 온화한 성품과 성적 능력이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요리 도중 손가락을 벤 량선생은 여의사 린을 찾아가는데, 치료를 받고 나오는 길에 그녀의 빨래 짜기를 도와주게 된다.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팔소리와 함께 끼어드는 탕씨. 그는 린의 구두를 손에 들고 있다. 작아서 신을 수 없게 된 구두를 그녀의 부탁으로 크게 늘려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성적 상징을 품은 일련의 페티시즘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제시한다. 특히 여성의 발에 대한 페티시즘은 영화의 주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색, 계>에서 양조위의 아내인 '이부인'으로도 출연한 바 있는 '조안 첸'이 섹시한 아줌마로-_-)

영화의 오프닝은 엄마의 깨끗이 닦인 맨발의 걸음 걸음을 보여주며 시작됐고, 떠나간 남편의 팔루스는 신발로 전위되어 꿈꾸는 엄마의 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역시 여성의 발은 남녀간의 에로스를 매개하는 성적 대상물로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동화적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오늘날 디즈니에 의해 윤색된 <신데렐라>의 원전은 본래 참혹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본래의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신부감을 물색하던 왕자가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작은 발을 가진 여인을 수소문했는데, 공주의 자리를 탐낸 신데렐라의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가 각각 엄지발가락과 뒷꿈치를 잘라 왕자가 제시한 털 슬리퍼를 신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신발 위로 흐르는 피 때문에 그녀들의 수법은 차례로 탄로 났고, 그제서야 왕자는 작은 발의 신데렐라를 찾아내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원초적인 발 페티시즘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청대에 이르기까지도 횡행했던 중국의 전족 풍습에서도 발 페티시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찾아볼 수 있다. 너무 작아서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신발을 계속 신을 수 있게 수선해주는 탕씨 이야기는 모종의 상징성을 지닌다. 이처럼, 두 번째 에피소드의 초반에 이미 탕씨와 여의사 린의 관계가 의미심장하게 암시되는 것이다. 이어서 마을의 축제날에 자신들의 불륜관계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마침 야외상영장에서 치한 누명을 쓴 량선생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알리바이를 꾸민다. 실제로는 탕씨의 집에 있었던 린이 그 시각에 량선생에게 집밖에서 추행을 당했다고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탕씨 또한 친구 량선생에게 누차 자수를 권한다. 뒤늦게 이런 속셈을 알아챈 량선생은 우정의 덧없음과 벗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자살하고야 만다. 그런데 자살하기 전. 량선생은 간병차 방문한 탕씨가 집안에 굴러다니는 총을 보고 탐내자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었다며 케이스만 놔두고 가져가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탕씨가 량선생의 남성을 빼앗는 행위로 간주된다.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던 엄마의 텅 빈 옷가지들처럼, 량선생 역시 이미 알맹이가 가출해버린 ‘껍데기’로 비유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량선생의 죽음을 미리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두 번째 에피소드는 말초적인 사랑의 비열한 말로와 배신을 그리고 있다.


배신했던 남자의 배신당한 이야기
1976년 가을, 이야기는 다시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배경이었던 중국의 남부로 옮겨간다. 친구 량선생의 목멘 시체를 코앞에서 목격한 탕씨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부인과 함께 지방으로 좌천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아들은 이제 반장이 되어 이들 부부를 안내하고 탕씨의 재교육을 관리한다.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사냥을 다니면 작업시간으로 쳐주겠다는 반장의 배려에 밤낮으로 아이들과 꿩이며 토끼 사냥을 쏘다니는 탕씨. 그런 그에겐 한 가지 철칙이 있다. ‘아직 어린 새끼 새는 쏘지 말 것’.

탕씨의 좌천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홀로 외로이 집을 지키던 탕씨 부인에게서 어머니의 향취를 느낀 반장은 결국 그녀와 위험한 육체관계에 빠져든다. 불륜의 장소가 엄마의 조약돌 집이라는 점과 성행위 중 자신을 ‘알로샤’로 불러달라며 애걸하는 대사에서, 그가 마침내 성적 대상으로서의 대리모를 찾아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들 관계를 알아챈 탕씨는 다음날 반장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반장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하나 던진다. 부인은 탕씨가 자기 배를 보며 ‘벨벳’ 같다고 좋아한다고 했다는데, 시골 촌놈인 반장으로서는 대체 벨벳이 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말에 한차례의 자비를 베푼 탕씨는 내가 벨벳을 구하는 날이 네놈이 죽는 날”이라는 말을 남기고 벨벳을 구하러 베이징으로 향한다. 그러나 막상 베이징에 다다르자 그는 마음을 다잡고 부인과 동네 아이들에게 안겨줄 선물만을 대신 사온다. 겨우겨우 갈등이 봉합되려는 순간, 마지막으로 탕씨를 독대한 반장은 실망한 눈치로 어디선가 구해온 벨벳을 펼쳐보이며 아주머니 배와 전혀 다르다고 탕씨에게 따져 묻는다.

“탕!”(그래서 탕씨인가;;)



아직 어린 새끼 새는 쏘지 말 것. 자신의 정언명령은 급기야 무너져버리고, 격분한 탕씨는 방아쇠를 당긴다. 자신의 바람기와 부인의 외도 사이에서 갈등하던 윤리적 고민은 그가 질투에 사로잡힘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총’과 ‘나팔’로 대변되던 그의 폭력적 남성성은 일방적으로 ‘분출’되기만 했을 뿐, 그의 주변은 온통 비극으로 뒤덮여간다. 수렴되지 않는 분출. 그것은 곧 고독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이로써 탕씨의 사랑은 인과응보적인 도식 속에서 길을 잃고, 어머니와의 근친적 결합을 갈구하던 반장의 금지된 사랑 역시 죽음으로써 그 댓가를 치룬다. 질투와 본성의 향연 끝에 펼쳐지는 비극이 세 번째 에피소드의 결말.


그럼에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1958년의 겨울, 중국 서부의 광활한 고비사막이 펼쳐진다. 여행길에서 만난 친구로 보이는 두 여인이 낙타를 탄 채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한 명은 결혼하기 전의 탕씨 부인이고 다른 한 명은 반장의 엄마이다. 탕씨 부인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자신에게 청혼할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며 줄곧 수다스럽지만, ‘끝이 없는 길’로 향하는 반장의 엄마는 시종일관 조용하다. 갈림길에 들어선 그녀들. 탕씨 부인은 곧 막다른 길에서 탕씨와 대면하지만, 끝이 없는 길에 들어선 반장의 엄마는 남편 알로샤를 만나지 못한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다만 알로샤가 남긴 편지 몇 통과 육신이 없는 텅 빈 옷가지들, 신발, 훈장… 그 앞에 선 그녀는 목놓아 운다. 이는 곧 대상으로서의 사랑이 영원히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빈 옷가지들이 떠내려가는 강물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반장의 모습이 겹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들의 세계는 그렇게 순환 속에서 힘겹게 신음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광적인 축제 열기로 가득한 탕씨 부부의 야외 피로연장과 기차 안 좁은 화장실에 앉은 반장 엄마의 초라한 모습이 대비된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애를 낳는 엄마.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갑자기 기차를 세우고, 지나온 철길을 거슬러 달리기 시작한다. 변기 구멍으로 떨어져 철로에 놓인 아기. 반장을 데리러 뛰어가는 엄마의 길엔 탄생을 축하하는 듯한 꽃들이 만개해있다. 아기를 안고 기차 지붕 위에 서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외쳐대는 엄마.



“알로샤! 무서워 마! 기차가 위에서 멈췄어! 그날이 오면 애가 웃을 거야!”

그 때가 언제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다시 떠오를 것이다.

철로 위에서 태어난 아기의 삶은 곧 ‘노정’을 의미한다. 길 위에 던져진 사랑. 끊임없이 헤메이고 갈구하도록 운명지워진 사랑.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다양한 사랑의 군상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자리시킨 길 위의 사랑을 가장 따듯한 시선으로 그리고 싶은 것은 아닐까. 미친듯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랑. 그것은 곧 베르테르적인 사랑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기에 사랑 하나만큼은 끝끝내 지켜낼 수 있는 사랑.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기에 빼앗기만 하나 결국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고독에 이르는 사랑…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 어느 쪽도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 걱정 말라. 다행히도 태양은 항상 다시 떠오르니까. 이처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그 특유의 우화적인 언어로 우리에게 사랑에 관한 일종의 성찰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는 은밀히, 극중의 앵무새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사랑이면 "괜찮아."










ps. 괜찮아? 정말?





by sputnik



by sputnik | 2008/06/14 03:46 | [영 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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